2013 가을 [人터뷰]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 김선우 시인을 만나다
[人터뷰]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 김선우 시인을 만나다
인터뷰 : 류형림(모구) 문지은(반아) 여는 민우회 여성건강팀
정리 : 여는 민우회 편집팀
하이파이브 김선우
일년에 한번 자궁경부암 검사 받으러 산부인과에 갈 때 여자가 만들었다면 이 기계는 따뜻해졌을 텐데 커튼이 젖혀지고 살짝 피가 한 방울, 이 기계 말이죠 따뜻하게 만들면 좋지 않겠어요?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중에서 |
네 권의 시집, 세 권의 소설, 두 권의 산문집, 한 권의 칼럼집
‘신선’같은 시인이라고 규정짓기엔 뭔가 범상치 않은 에너지를 가진 천생 글쟁이
때론 여성의 입이 되어 가려운 데를 긁어주고,
때론 강정마을, 쌍용자동차해고노동자같이 사회의 아픈 곳을 찾아다니며 함께 아파하는 김선우 시인을 만났다
시인이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대학 때는 세상이 좀 좋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좋은 혁명가, 활동가, 세상을 좋아지게 하는 데서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격렬한 운동권 세대였는데 대학에 다닐 때 제가 꿈꿔왔던 신념, 혁명의 가능성 같은 것들이 졸업과 함께 무너졌어요. 그때가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한때 혁명의 이상이었던 모든 나라들이 차례차례 무너져가는 세계사적 조류와 함께 한국에서도 여러 운동진영들이 한꺼번에 망가지기 시작하던 때였어요. 삶의 이상이라 할 것들이 완전히 산산조각나면서 세상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별로 없는 그런 시기였죠.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삶의 희망이 없는 단계에서 나한테 딱 떠올랐던 것이 시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때부터 습작을 본격적으로 시작해서 3년쯤 후에 시인으로 등단을 했어요. 그래서 시가 나를 살렸다는 얘기를 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에요 나는. 살아있으라고 그때 갑자기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이 떠오른 거겠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등단한 후에 10년간 시집만 내셨는데 소설가로 삶을 전환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시에서 소설로의 전환에 어떻게 적응하셨는지 궁금해요.
지금 시, 산문, 비평, 소설을 모두 쓰고 있는데 ‘몸 바꾸기’가 전 비교적 쉬워요. ‘왜 내가 두려움이 없을까’라는 질문을 해본 적이 있죠. 보통 시만 쓰다가 소설을 쓰는 게 덜컥 저지르기 쉬운 일은 아니에요. 나는 도대체 왜 이럴까 생각해보니까 어렸을 때 일기를 쓰며 놀던 습관 때문인 것 같아요. 보통은 하루에 있었던 일을 쓰는데 그때 나는 그냥 일기를 가지고 놀았던 거 같아요. 어느 날은 시 같기도 하고 어느 날은 소설 같기도 하고 그랬어요. 나중에 읽어보면서 재밌어하고 고치기도 했어요. 그냥 나한테 존재하는 건 글쓰기였고, 뭔가 쓰고 있는 상태의 내가 너무 좋았던 거죠. 여전히 글을 쓰고 있는 순간이 가장 좋아요. 책상에 혼자 앉아있는 시간이 확보되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느껴요. 매일 작은 시간이라도 책상 앞에 혼자 고민하는 시간이 주어지면 에너지가 소진되지 않아요.
그게 되게 신기한 게 희망버스, 강정마을, 쌍차 등에 관여를 하면서도 거의 매년마다 한권씩 책이 나오는 거에요.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어떤 기자가 물었어요. 사실 계속 고단한 일들이 펼쳐지기는 하는데, 현장에 계속 관심이 가 있고 신경을 쓰면서도 나한테 최소한 하루에 서너시간 책상 앞에 앉아서 혼자 뭔가를 쓰는 시간만 확보가 된다면 에너지가 생겨요. 이런 삶이 가능한 이유는 책상 앞을 내가 정말 좋아하기 때문이죠. 천생 글쟁이에요.
보통 김선우 시인의 작품은 에코페미니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태어난 조건, 내 몸에 갖고 있는 조건이 그래요. 강원도 산골에서 태어났고 어렸을 때 소위 자연(모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자연이에요. 이 사람, 이 생명. 태어나서 자라고 있는 이게 바로 자연이에요.”), 그냥 내가 자연인데 이 자연을 보듬어주는 큰 자연이 놀이터였기 때문에 분리감이 없었어요. 정서가 형성되는 시기에 땅과 숲과 물과 자연의 질료 속에서 그것들이 주는 즐거움과 에너지를 교감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것과 굉장히 다르거든요. 집은 가난했지만 최고로 자유로웠죠. 그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너무너무 자연스럽게 에콜로지적인 마인드가 맞는 거죠.
페미니즘도 마찬가지예요. 나중에 여성학을 공부해서 여성의 삶을 느끼게 된 게 아니에요. 내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여성학이라는 게 이제 막 출발하는 단계였고 여성학이라는 말이 보편적이지 않았어요. 이미 내가 갖고 있는 관점 자체가 여성학적 관점이었어요. 초기에 여성학을 공부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랬을 거라고 생각해요. 딸로서 엄마의 삶을 보면서 ‘왜 엄마가 저렇게 살아야해?’라는 질문들을 하잖아요. 그런 질문들이 여성학의 가장 중요한 코드들이 되어있더라고요. 남자아이를 낳기 위해 자식을 아홉 명 낳은 엄마. 그 중에 둘은 죽었어요. 그 당시에는 많은 여자들이 그랬어요. 남아선호가 깊게 뿌리내려있는 그런 집안에서 여자애로 살아가면서, 엄마를 바라보면서 그 여자아이가 던졌을 많은 질문들. 그런 게 바로 여성학적 질문들이 된 거죠. (나중에 여성학을 접하셨을 땐 기분이 어떠셨어요?) “그거지! 그거잖아!” 반가웠죠. 대중 속으로 더 잘 스며들었으면 하는 응원의 마음도 생겼고요. 그렇게 저의 에코페미니즘이 만들어진 거죠.
여성이기 때문에 많은 질문들을 껴안고 있는 여성들에게 응원하는 마음으로 추천하고 싶은 시는 무엇인가요?
너무 많아요. 이번 시집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는 편하게 대중들과 함께 하고 싶어서 소소한 경험들을 다룬 시가 많아요. <하이파이브>같은 시. 일상적으로 여자인 나는 이렇게 느끼는데 이야기하기 어려운 것들, 말하면 안 되고 꺼려지는 지점들, 그 지점을 밀어붙여서 이야기하는 게 가장 중요하고 어렵죠. 그런 지점들을 일상적인 말들로 편안하게 푸닥거리하는 시가 많아요. 처절하고 남자들이 무서워하는 시는 첫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있길 거부한다면》에 많죠. 첫 시집이 나왔을 때 제 시집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남성혐오라고 이야기했어요. 사실 난 아무도 혐오하지 않아요. 우리 다 같이 잘살자는 거지. 그런데 아직도 한국사회에서 ‘꼴페미’ 이런 반응을 보이는 남자들은 마치 여자들이 잡아먹는 것처럼 남성혐오가 있다고 이야기해요.
마지막으로 민우회에 한마디해주세요.
말 그대로 민우(民友) 같아요. 너무 클래식하게 느껴지는 어떤 지점은 돌파해야하지 않을까싶은 마음은 있는데 많은 여성단체들이 저마다 몫이 있으니까. 지금 정도의 민우회, 클래식하게 뭔가 든든한 배경이 되는 그런 민우회가 아주 좋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활동가들(모구와 반아^^)이 있는데 잘 될 거라고 생각하고요. 활동가들이 스스로 가지고 있는 에너지와 가능성을 발현시키면서 행복할 수 있는 단체로 오래오래 갔으면 좋겠어요. 30주년이 되면 뭐라도 하게 불러주세요^^
혼자 힘들어하고 있을 때 위안이 되어주었던 김선우 시인의 시를 떠올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인터뷰 요청을 드렸어요. “여성민우회! 우리사회 어려운 곳들에 든든한 뒷심 되고 계신 벗님들! 여성민우회에서 인터뷰 청해주시니 제가 영광이지요”라고 하시며 흔쾌히 응해주셔서 감동이었어요. 그리고 인터뷰 당일, 민우회의 회원이 되어주셨습니다! 활동가들에게 책도 선물해주셨어요. 고맙습니다. 조만간 또 만날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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