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가을 [당신의 책꽂이] 생존을 함께 한다는 것, 『꽃을 던지고 싶다』
[당신의 책꽂이] 생존을 함께 한다는 것, 『꽃을 던지고 싶다』
신필규(스머프) 여는 민우회 회원
예나 지금이나 그렇지만, 큰 고통을 겪은 사람들을 마주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저 일방적인 위로만 하자니 상대방을 유리시켜버리는 것 같고, 그렇다고 섣불리 이해한다는 말을 했다가는 상대방의 경험을 내가 오만하게 재단하는 것만 같다. 거기다 내가 형상화해낸 고통이 상대방이 느낀 그것과 현저히 다를 경우? 담담한 상대방이 오히려 ‘내가 겪은 일이 그 정도인가?’라고 질문하거나 고통에 찬 이가 ‘네 눈엔 내 고통이 이정도로 밖에 안보여?’라고 반문할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에게 남은 일은 ‘가만히 앉아서 듣기’인데, 이것 또한 쉬울 리가 없다. 정말 상대방의 고통에 무관심하다면 모를까, 비탄에 찬 사람을 앞에 놓고 아무것도 안하기라는 게 쉬운 일일 리 없다.
『꽃을 던지고 싶다』를 읽는 일은 내게 위와 같은 고민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수기의 특성상 책 전반에 걸쳐 저자가 부각되는 것도 그렇거니와, 일상적이고 쉽게 쓰여 진 글은, 저자의 경험과 독자사이에 어떠한 장벽(어려운 단어, 번역어투 등)을 남겨놓지 않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가장 읽기 어려운 글로 다가온다(아마 이 책을 읽다 중간 중간, 책을 덮고 탄식한 사람이 나 만은 아니었으리라). 때문에 (글쓴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책을 읽어가는 과정은 저자를 바라보는 과정이자, 끊임없이 나를 의식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나는 제대로 반응하고 있는가?’ 하지만 이러한 나의 태도는 ‘온전한 한 사람으로서 역사성을 갖기 위해’ 피해경험을 쓴다는 글쓴이의 문장을 보고 달라졌다.
결국 폭력의 경험을 이해하는 것은 한 사람을 이해하고, 역사를 이해하는 일이 아닐까? 책을 읽고, 어쩌면 생존자들의 이야기 앞에서 안절부절 했던 나는 이입하지 못하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그저 틀린 말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게 두려웠던 것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발 한발, 피해경험의 극복을 위해 나아가는 글쓴이를 응원하고 마침내 책의 말미에 이제는 ‘살아갈 방법’을 알아낸 것 같다는 글쓴이를 바라보며 결국 고통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도, 극복하는 것도 살아남은 자들의 일이며, 정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듣고 함께 걷고 응원하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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