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가을 [활동가 다이어리] 상담소의 '걱정 레이더'가 돌아가고 있다
[활동가 다이어리] 상담소의 '걱정 레이더'가 돌아가고 있다
이선미(너굴) 여는 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상담소 레이더’가 있다. 성폭력이나 섹슈얼리티 이슈를 탐지하기 위한 레이더? 아니다. 이 레이더는 민우회 사무실을 탐지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다. 상담소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소곤소곤 이야기 할 때면 레이더에 걸린 것들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성산동 나루 3층에서 생활하는 23명의 활동가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생활하는 사무실. 추산이 안 되는 야근시간을 포함하면 꽤 많은 시간을 여기서 복작복작 지낸다. 각자의 일을 하느라 바쁜 민우회 사무실에 공동생활을 위한 나름의 규칙들이 있는데 주로 이 영역에서 레이더가 발동한다.
A4종이는 떨어져 가는 것을 발견하는 사람이 주문한다.
화장지가 떨어지면 밖에 나갈 일이 있는 사람이 사온다.
팩스, 복사기가 고장 난 것을 발견한 사람은 복사기 위에 적혀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AS기사님을 부른다.
법인 등기 서류 마지막 장을 쓰는 사람은 담당자에게 알려줘야 한다.
복사기에 색지나 라벨지를 넣어 출력 할 때는 전체 공지를 해서 아까운 종이를 버리는 일을 줄인다.
문서로 적어 놓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지켜야 하는 규칙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규칙들을 가끔 놓칠 때도 있지만 책임감 강한 민우회 활동가들은 비교적 잘 지키는 편이다. 상담소 레이더에 가장 많이 걸리는 분야는 바로 냉장고와 주방 분리수거이다. 점점 쓰레기가 되어 가는 음식으로 냉장실이 가득 찰 때 상담소 레이더가 움직인다. 음식물 쓰레기와 비닐 분리수거를 제대로 안했을 경우 누가 버린 것인지 추적하여 분리수거 기준을 알려주기도 한다. 처음부터 냉장고에 관심이 많았는지, 냉장고 가까운 곳에 있다 보니 관심이 많아졌는지, 처음부터 걱정이 많았는지 상담소에 들어와서 걱정이 많아졌는지 알 수 없지만 상담소 레이더는 유독 냉장고와 그 주변에서 발동하며 걱정하는 횟수가 잦다. 최근 상담소 레이더의 관심은 냉동실 얼음이다. 얼음을 넣은 시원한 음료가 간절한 요즘 같은 날씨에 활동가들의 레이더도 냉동실로 집중 된다. 사무실의 얼음을 만드는 공정은 간단하다. 세 개의 얼음‘틀’과 만들어진 얼음을 담는 얼음‘통’. 틀에서 끊임없이 얼음을 만들어 통에 담으면 그만이다. 철저히 수동시스템으로 운영되는 얼음생산은 한 박자를 놓치면 얼음이 똑 떨어진다. 이론적으로는 (이게 뭐라고 상담소에서는 왜 얼음이 떨어지는지를 분석했다) 얼음을 먹을 때마다, ‘틀의 얼음은 통으로, 비어진 틀에는 물을’ 이 두 가지만 지키면 여름 내내 얼음을 즐길 수 있건만 통은 종종 비어 있다.
상담소에서 얼음에 대해 논의를 했던 것은 통에 얼음이 없고, 틀도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다. 물도 부어놓지 않은 틀을 보고는 살짝 당황했지만 바빠서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넘어갔다. 두 번째 같은 상황을 발견했을 때는 냉장고에 공지를 붙일까 고민했지만 냉장고에는 이미 ‘얼음을 만들어 더위를 무찌르자’는 공지가 붙어 있다. 상집위(민우회 팀장과 대표, 처장, 소장이 함께 하는) 회의 안건으로 올리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뭐, 그렇게까지 하냐’며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세 번째 발견했을 때는 범인을 찾아볼까 생각했다. 분명 얼음의 수동 시스템을 모르는 한두 명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고 추적을 해볼까 했지만 이런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소심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기에 포기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비어 있는 얼음틀을 발견할 때면 어김없이 마음이 오르락내리락한단다.
몇 만 명이 국정원 선거개입 규탄 촛불시위를 하고 200여일을 종탑에서 보낸 재능교육 노동자가 종탑에서 내려왔다. 이런 때 사무실 얼음 얼리는 것에 대해 쓰고 있자니 타자를 치고 있는 손도 안절부절이다. 걱정 많은 상담소 활동가들은 이런 것까지 논의 한 적 있다는 재밌는 일화로 소개하려고 했던 의도는 온데간데없고, 얼음통은 왜 비워져 있는 것인가를 점점 더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이 상황이 스스로 당황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일상을 나누지 못하는 사람과 함께 한 투쟁의 끝이 얼마나 허무한가.
우리가 그 어디보다 사무실을 편안하게 생각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일상의 규칙들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더운 여름 얼마 안 남았지만 공동생활 규칙에 얼음 만들기도 있음을 공유하며 생활공간에서 보이지 않는 노동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면을 빌려 이야기한다. 그리고 다 같이 지켜야 하는 규칙이 발견 될 때면 마음이 오르락내리락 하기 전에 얼렁얼렁 해결하자. 말하기 전에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항상 확인하지 않는가. 이런 사소한 하나하나를 맞춰가는 것 그것이 민우회의 조직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다고 급하게 포장하며 속 좁은 사람이 되는 두려움을 접어 본다.
재밌자고 시작 했던 글이 진지해 졌다. 부록으로 상담소 활동가들의 걱정 스타일로 마무리 하련다. 활동가 이니셜 토크!
D는 예민한 감각과 빠른 행동력으로 걱정을 빨리 해결하여 걱정의 잔여물을 남기지 않는다. 그야말로 상담소 해결사라 불러도 손색없다.
M은 순간순간 소외된 것들을 포착하는 능력이 뛰어나고 세심하다. 그래서 걱정이 많다. 그 걱정들을 잘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 하고 있는 M을 응원한다.
N은 걱정이 없는 척 하지만 자신이 걱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만큼 걱정에 빠져들 때가 있다. 주변에서 보면 답답할 뿐이다.
O는 걱정 때문에 밤에 잠을 못 잔다. 상담소 자타공인 걱정 1인자. 하지만 그 걱정 때문에 상담소의 활동이 탄탄해진다.
S는 머리만 대면 잠들 수 있는 능력자. 잘 자는 사람치고 걱정 많은 사람이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S는 요즘 밤에 잠을 잘 못자 피로가 누적된 상태이다.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걱정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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