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겨울 [민우ing] '낙태', 협박의 도구가 되다
‘낙태’상담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 4월, 한 여성이 격앙된 목소리로 “낙태상담이 가능하냐”는 전화를 해왔다. 그녀는 헤어진 남자친구에게 임신중절을 이유로 협박받고 있으나 도움을 구할 곳이 없다고 했다. 이미 몇 차례 ‘여성긴급전화’에 전화를 해봤지만 임신중절은 불법이기 때문에 이로 인한 스토킹 피해를 입고 있어도 도움을 줄 수 없다는 말뿐이었다고 했다.
형법상 낙태가 불법인 한국에서 이에 대한 상담지원을 한다는 것은 현실적 어려움이 있다. 소위 ‘도울 수 있는 것’이 없다.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이 출산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정보제공과 상담을 받을 수 있는 체계를 갖추고 있는 유럽국가도 많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 몇 가지 예외조항을 제외하고 원칙적으로 낙태가 불법이기 때문에 기관에서 운영하는 ‘위기임신’에 대한 게시판 상담 답변내용을 보면 출산여부를 고려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한다기보다 “낙태는 엄연한 살인”이라는 말과 함께 출산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주거나 “정 키우기 어렵다면 낳아서 입양을 보내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마땅히 도움을 청할 곳이 없다”던 그녀들은 민우회로 전화를 걸어왔다.
민우회는 2010년부터 임신중절관련 상담을 받고 있다. 어느새 4년째다. 보건복지부 역시 같은 해부터 ‘보건복지콜센터 행복전화 129’를 통해 “불법 인공임신중절 예방을 위해 위기임신 상담 및 불법 인공임신중절 광고·시술기관 신고”를 받았다. 2011년에는 공공기관에서 처음으로 ‘불법낙태 시술 병원’을 고발하기도 했다. 말 그대로 ‘낙태고발정국’이었다.
2010년 불법낙태에 대한 단속 조치가 본격화된 때, 민우회는 시술 병원을 문의하거나 낙태를 고민하는 여성, 낙태를 강요받고 있는 여성, 남성 파트너에게 본인 동의를 받지 않고 낙태 시술을 했다는 이유로 고소당한 여성 등의 상담전화를 받았다. 이러한 상담은 계속 이어져 올해만 12건의 상담이 있었다. 이전에는 수술이 가능한 병원, 비용을 문의하던 것이 주요내용이었다면 최근에는 ‘낙태죄’를 빌미로 한 상대남성의 협박 및 스토킹 관련 상담이 주요한 경향이다. 12건의 상담 중 10건(2012년 총 3건)이 이와 관련한 내용이었다. 남성들의 협박의 이유는 주로 ‘관계유지’와 ‘금전적 요구’이다.
이별, 어느새 ‘사건’이 되다
상담이 들어온 사건들은 실제 경찰조사가 이뤄지기도 했고, 벌금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민우회는 경찰조사와 재판동행을 하며 상담사례를 모아 형법에서의 ‘낙태죄’ 악용사례, 실질적 법 개정을 위한 공론화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11월 7일 <‘낙태죄’ 법 개정을 위한 연속포럼1) 그 첫 번째, 모자보건법 상의 ‘배우자 동의’ 항목의 현실>을 열었다.
■ 4월, 20대 여성(재판동행, 의견서 제출, 공동변호인단 지원)
: 연인사이였던 남성과 결혼식을 올렸으나 파혼한 상태. 연애과정에서도 음주 시 폭언, 기물파손 등이 있었으나 아이를 잘 키워보자는 결심을 하고 식을 올림. 하지만 반복되는 폭언, 폭행 등을 이유로 임신중절을 결정하게 되고 이에 대한 동의내용에 각서를 작성하였고, 여성은 이를 근거로 수술진행. 이후 결혼 준비과정에서 든 비용에 대한 금전적인 문제로 법적다툼이 시작 됨. 이 과정에서 남성이 불리해지자 낙태수술에 대해 고소함. 재판결과 남성은 낙태방조죄로 여성은 낙태죄로 의사는 업무상 낙태죄로 기소되었으나 1심 최종 판결에서는 피고인 여성 벌금 200만원. 의사 징역 6월 및 자격정지 1년. 의사 징역형은 집행 유예함. 남자 무죄. 현재 항소진행 중.
-민우회 2013 임신중절 상담사례 중
위 사례는 언론에서도 많이 노출된 사건이다. 현재 항소심을 준비하고 있는 건으로 첫 번째 연속포럼의 주제이자 많은 남성들이 여성들을 ‘협박’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모자보건법 상의 ‘배우자 동의’ 항목의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올해 접수된 대부분의 남성협박은 이 사례처럼 결혼을 약속했으나 헤어지게 되는 경우에서 발생한 문제들이었다. 하지만 ‘낙태죄’는 남녀 둘의 관계유지, 여성의 임신유지가 지속되지 못한 원인이 남성의 폭력, 집착, 스토킹 등에 있더라도 어느새 남성이 여성을 고소할 수 있는 위치에 설 수 있게 한다. 법은 남성의 ‘동의’여부만을 두고 법적 처벌을 할 뿐 남성이 여성의 임신유지에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는 고려하지 않는다. 여기서 배우자의 ‘동의’는 말이 ‘동의’이지 실제 ‘허락’의 의미이다.
민우회는 여성의 재생산의 맥락에서 섹스, 피임, 임신, 출산 혹은 중절, 양육 등 단계에 대한 통합적인 시각으로 임신중절을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재생산 과정 중 하나인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고 처벌하는 ‘자기낙태죄’ 조항 삭제를 운동과제로 삼고 있다. 하지만 임신중절에 대한 여성들의 처벌조항을 삭제하는 것은 긴 호흡으로 가져가야하기에 실제 여성들이 계속해서 남성에 의해 협박당하며, ‘피고인’이라는 이름으로 법정에 서게 되는 이유에 대해 살펴보고자 ‘배우자 동의’ 항목의 현실을 첫 번째 주제로 선택했던 것이다.
잊힐 수 있으나 사라질 순 없는 이야기
같은 맥락으로 여성 25명의 임신중절 경험을 담은 인터뷰집 <있잖아… 나, 낙태했어>가 출판된 지 10개월이 지났다. 처음에 제목을 정할 때만 해도 너무 직접적인 표현은 아닐지 우려했었다. 서점에서 책을 살 때,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때 제목 때문에 주저할지 모른다는 걱정이었다. 하지만 꾸준하게 책이 판매되고, 동네도서관 희망도서로 신청했던 책자가 대여중이란 사실이 신기하고 가슴이 벅차다. “내가 낙태를 했다”는 여성들의 고백이 실로 힘을 갖고, 책을 읽는 이와 세상과 닿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신호로 느껴진다. 그래서 더더욱 꾸준하게 활동할 힘을 얻고 있다.
1) 본 포럼은 공익인권법재단 공감과 민우회 공동주최로 개최됐으며, 총 3차례에 걸쳐 모자보건법 상의 ‘배우자 동의’ 항목, 형법 ‘자기낙태죄’의 문제점, 실제 법 개정을 위한 세부적 논의 등의 주제로 진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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