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여♥소♥)Margaret attwood 의 시녀이야기
The Handmaid's Tale :: Margaret Atwood
<시녀이야기>
모임날짜:
모인 사람: 소다, 신기루, 체리향기, 늘바람, 여울
발표자: 여울
1.작가소개
마거릿 애트우드(영어: Margaret Eleanor Atwood, 1939년 11월 18일~)는 캐나다의 작가이다. 그녀는 다작하는 시인, 소설가, 평론가이며 여성주의자이자 정치적 활동가로 국내외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사변소설과 남부 온타리오 고딕을 포함한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써왔다. 그녀는 보통 여성주의자 작가로 인식되는데, 그것은 젠더 이슈가 그녀의 작품 세계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녀의 작품은 캐나다인의 정체성, 미국이나 유럽과 캐나다의 관계, 인권문제, 환경문제, 캐나다의 자연, 여성성에 대한 사회적 미신, 예술에서의 여성의 육체 묘사, 여성의 사회적, 경제적 착취, 여성간의 관계, 여성과 남성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녀는 또한 소설 <<Oryx and Crake>>과 최근의 에세이에서 통제되지 않은 생물기술에 대한 깊은 관심과 우려를 표현하였다. 평론가로서 그녀는 기념비적인 작품인 <<Survival: A Thematic Guide to Canadian Literature (1972)>>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 작품은 1970년대에 캐나다 작품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키기도 하였다. 그녀는 또한 몇몇 텔레비전 대본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카페로 스크랩
2. 시녀이야기 줄거리
환경 오염과 전쟁으로 인해 출산율이 현격히 떨어지면서 쿠데타로 북미 대륙을 장악한 독재 정부 길리아드는 출산이 가능한 여성을 강제 징집해 고위관의 씨받이 역할을 시킨다. 임신할 수 없는 고위관의 '아내' 의 증오와 위협을 받으며 '아주머니' 라는 늙은 여인들에 의해 감시 당하고 '하녀' 들의 심부름을 통해서만 제한 된 외출을 할 뿐 감옥이나 다름 없는 곳에서 지옥 같은 삶을 살아가는 '시녀' 들은 자살마저도 뜻대로 할 수가 없다.
심지어 '시녀' 들끼리도 고발이 두려워 서로를 믿지 못하고 견제한다. 아이를 낳으면 다른 고위관에게 배정 되어 목숨을 연명하지만 기형아를 낳거나 출산을 못하면 폐기물 청소 지역으로 보호 장비 하나 없이 보내져 고통 속에 죽을 수 밖에 없다. 남성인 고위관 쪽에 문제가 있더라도
모두 '시녀' 의 탓으로 여겨져 가차없이 죽임을 당한다.
본명도 삭제 당하고 해당 고위관에 소속 되었다는 의미로 이름 붙혀진 '오브프레드' 는 그러한 시녀들의 대표자로서 끔찍한 생활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 남편은 생사 불명으로, 딸 아이는 빼앗긴 채 절망과 고통 속에 살아가던 오브프레드는 시간이 지날수록 오로지 살겠다는 절박함만으로 그 생활에 길들여져 간다.
역시 '시녀' 로서 징집 되었던 친구 모이라의 탈주와, 함께 장보기 외출을 하는 오브글렌의 비밀스런 연대, 고위관의 은밀한 취향에 의한 일탈과 그것을 질투한 '아내' 의 주선으로 운전사와 밀회를 하는 등의 사건들이 오브프레드에게 일어나지만 그녀는 자신의 의지 하나 없이 그저 이끌려만 간다. 한참이 지나서야 오브프레드의 기록 테이프를 발견한 학자들이 그녀의 뒷 이야기를 추정해 보지만 수동적인 삶을 살던 그녀가 해방된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확답하지 못한다.
3. 생각해 볼 것들
1) 길리아드 사회에서는 여성을 어떠한 방식으로 통제하고 있는가?
소설에서는 철저히 가부장제를 기반으로 한 국가를 이루고 있다. 가부장제를 기반으로 여성을 통제하는 방식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하다. “씨받이” 라는 명목으로 준 강간과 인권을 통제하고 말살하는, 현재로서는 비현실적인 일들이 수백년 간 이어져 왔었다. 길리아드 사회는 과거(?) 우리에게 존재했던 철저한 가부장제를 이용하고 있다.
소설에서 나타나는 아주머니' 와 '시녀' 의 갈등은 현실의 고부 갈등을 역력히 투사하고 아내와 시녀의 갈등 또한 본처와 첩과의 갈등을 연상시킨다.
급기야는 두려움에 자신을 고발할 수도 있었던 동료의 죽음마저 기뻐할 만큼 그녀는 자존감을 잃고 비굴해진다. 왜 '시녀' 들은 똑같은 고통을 받으면서 함께 연대하지 못했을까. 왜 '하녀' '아주머니' '아내' 들은 같은 여자면서 '시녀' 들을 동정하지 못했을까.
그것이 비단 그녀만의 경우가 아니라는 것을 반영하듯 소설 안에 팽배한 것은 제약하고 강제하고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남성들' 에 대한 저항감이 아니라 서로를 믿지 못하는 '여성들' 간의 경계다. 연대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실 마냥 불안하고 같은 일을 겪고 있다는 공감보다는 더 낫고 못하고의 비교와 질시가 우선 한다.
결국 서로를 적으로 만드는 것을 여성의 본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본성이 나약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서로를 적으로 만드는 것은 가부장제의 통제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내와 시녀의 관계처럼, 시녀를 통제하고 감시하는 아주머니처럼, 가부장제는 여자의 적을 여자로 내몰며 남성에게는 저항할 이유가 없이 만들고 서로를 적대하게 만든다.
현실에서도 남성의 힘에 의존하는 것을 합리화 하기 위해 저항하거나 반발하는 여성들을 배척하며 그들의 방법이 틀렸다고 비판하고 고치려 함으로서 스스로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그 주체성 없는 불안함이 동성으로서의 공감을 방해하고 연대를 붕괴시킨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서로와 연관 없는 구태를 물리고 기혼이 미혼을 멸시하며 가정 주부가 일하는 여성을 비난하는 것이 그와 같다. 모두 자신의 안전망을 확보하고 보호 받는 것에 대한 굴욕을 애써 잊기 위해 자신과 다른 위치에 있는 여성을 자기 밑으로 끌어 내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성의 통제를 비롯하여 길리어드의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지배의 논리를 적용시켜 군림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기에 이르렀다. 여성들에게 가해진 압제의 궁극 목적은 의식의 말살이었다.
단편적으로 언어사용의 통제가 그것이다. 이로써 여성들은 개인과 개인. 사회와의 단절을 경험 하게 되며 자신의 주체성을 차차 잃어가게 된다.
인간의 이성, 자유, 의지는 온데간데없어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미래의 세계 길리어드에서 여성은 단지 일반화된 출산도구의 상품 그 자체일 뿐이었다.
2)과연 시녀이야기의 시대가 미래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가?
이 이야기는 놀라움. 끔찍함. 경악과 탄성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이것이 얼토당토하고 황당무계한 이야기쯤으로 치부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내용의 전개 역시 현실에 기반을 둔 것이라는 점이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아직도 여성에 대해 동등의 개념을 같이 공유하길 거부하고 있다.
때 지난 우월성의 감정은 그들의 체제를 유지하고픈 그 미약한 근거로 위태위태하게 비쳐질 뿐이다. 여성들의 입장만 관철시키자는 태도 역시 아니다. 세상을 일궈나가는데 있어 남성여성은 절대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상호보완적으로 서로를 지탱해 나가야 할 것이다. 불평등은 성이라는 권력을 남성이 장악하는 데서부터 그 뿌리가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책을 통하여 여성들은 분명히 자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국가나 다른 성으로부터, 여러통로를 통하여 통제받고 있는건 아닌지 , 우리의 감각과 생각들을 제어당하지는 않는지 무감각하지 않게 생각해 봐야 할것이다. 또한 스스로 성의 권리와 권력을 찾아나가야 할 것이다.
생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결국 생산을 짊어지고 갈 노동력을 생산해야 한다. 그러나 여성의 몸만이 생산을 할 수 있다. 효과적인 출산체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성의 성을 전격적으로 통제해야 한다. 신체 뿐만이 아니라 정신도 통제의 대상이다. 현대 출산을 기피하는 여성들이 늘어 그전에 산아제한을 하던 국가는 위태해진 현실을 위하여 둘, 셋 당신이 아이를 낳는 것만이 정말로 국가를 위하는 일이고, 우리 사회를 위하는 일이고, 인류를 위하는 일이라고 광고한다. 따라서 이에 반발하는 여성은 모진여성, 이기적인 여성으로 치부해 버린다.
4.참고) 영화-아일랜드
시녀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영화 (아일랜드)를 떠올려 보았다.
줄거리-인간의 배아를 복제하려는 시도 속에 2014년, 인간복제를 성공시켰다. 복제인간들은 자신들이 복제인간이라는 것을 모른 채, 지구 전체가 오염 되었다는 이유로 한 곳에서 생활하며 치유센터를 통해 관리된다. 스폰서의 요청이 있을 시 아일랜드 행 추첨으로 위장하여 복제인간들의 장기를 추출한다.
이들은 성인상태로 배양이 되고, 배양 시작부터 12개월 후면 제품으로 사용이 가능하다. 품질관리를 위해 깨끗한 환경에서 엄격한 관리가 이루어진다. 제한된 지역 안에서만 생활하도록 하는 통제 프로그램을 입력하고 15살 수준의 교육 프로그램을 주입한다. 복제인간은 장기 수요를 위한 기능 이외에 대리 출산의 용도로도 사용된다.
복제인간들은 자신들을 생태적인 재앙에서 살아남은 21세기 중반에 지구 종말의 생존자라 믿고 있다. 링컨 6-에코(이완 맥그리거)와 조던 2-델타(스칼렛 요한슨)는 수백 명의 주민들과 함께 부족한 것이 없는 유토피아에서 빈틈없는 통제를 받으며 살고 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부터 몸 상태를 점검 받고, 먹는 음식과 인간관계까지 격리된 환경 속에서 사는 이들은 모두 지구에서 유일하게 오염되지 않은 희망의 땅 ‘아일랜드’에 추첨이 되어 뽑혀 가기를 바라고 있다. 최근 들어 매일 같이 똑 같은 악몽에 시달리던 링컨은 제한되고 규격화된 이 곳 생활에 의문을 품게 된다. 그리고 곧, 자신이 믿고 있던 모든 것들이 거짓이었음을 알게 된다. 자기를 포함한 그곳의 모든 사람들이 사실은 스폰서(인간)에게 장기와 신체부위를 제공할 복제인간이라는 것! 결국 ‘아일랜드’로 뽑혀 간다는 것은 신체부위를 제공하기 위해 무참히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어느 날, 복제된 산모가 아이를 출산한 후 살해되고 장기를 추출 당하며 살고 싶다고 절규하는 동료의 모습을 목격한 링컨은 아일랜드로 떠날 준비를 하던 조던과 탈출을 시도한다. 그간 감춰졌던 비밀,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외부의 모습을 보게 된 이들은 자신들의 스폰서를 찾아 나서고 오직 살고 싶다는 본능으로 탈주를 계속한다. 세상 밖으로 나와 이 둘은 자신의 스폰서를 찾아가게 되고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다시 유토피아로 돌아가 동료들을 구해준다.
- 영화에서 대체로 인간복제를 생각할 수 있는데 시녀이야기와 함께 생각해본다면, 아일랜드의 사람들은 모든걸 통제 당하지만 그 안의 사람들은 그것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국가의 완벽한 통제는 사람들이 감옥에 있음을 무감각 하게 한다. 혹시 우리도 이러한 감옥에서 예리하고 복잡하게 통제 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5. Margaret Atwood 의 추가 작품
<갈데까지 가보는 세상>
국가보다 기업과 시장이 모든 것을 장악하는 시대에, 대기는 오염되고 빈부격차는 극심해져 막강한 공권력에 의해 세상은 통제된다.
아버지가 과학자였던 덕에 상위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지미는 가족간의 단절감으로 마음을 상실하고 또래의 천재 소년 크레이크를 만나 포르노와 잔인한 동영상 등을 보거나 게임을 하면서 이렇다 할 목표없이 무료한 시간을 보내며 점차 더 무감각 해져간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비 도덕한데다 개체수도 많아서 세상이 썩어버렸다고 판단한 크레이크는 성인이 되어 인간의 본성을 지운 신인류를 복제한 뒤 남은 인류는 모두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아동 포르노를 통해 알게 되었던 오릭스를 사랑하게 된 지미는 크레이크가 그녀를 이용하는 것에 분개하여 그에게 맞서지만 끝내 크레이크가 저질러버린 일을 막지 못하고 공교롭게 투여한 백신 덕분에 그만이 전체 인류의 멸망 속에서 살아남는다.
그리고 그는 '눈사람' 이란 이름으로 신인류 '크레이커' 들을 데리고 생존해 나간다.
인간이 손에 쥔 날계란 같은 모럴을 쥐어틀 때, 어떤 일이 발생 하는가. 마거릿 애트우드는 현대에 벌어지고 있는 모럴 배격적인 일들을 투사해 연장선을 그어 마침내 멸망해 버린 근 미래를 그려낸다. 그가 중점적으로 탐구하고자 하는 것은 모럴의 건너편에 서 있는 것들이다.
그것은 부도덕이기도 하고, 비 도덕이기도 하며, 무 도덕이기도 하다. 온갖 범죄를 포함해 아동 포르노를 만들거나 잔인한 일을 일삼는 이들이 부 도덕자들 이라면 그것을 무심하게 관람하는 이들은 비 도덕자들 이다. 세상은 이러한 비 도덕자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유전자를 조작하여 종을 해체하고 오로지 인간을 위한 생산에만 활용하는 과학자들도 비 도덕자들 이며, 그것을 별 거부감 없이 소비하는 대중들도 비 도덕자들이기 때문이다. (※ 부도덕과 비도덕은 같은 개념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비 도덕이 '선악 경계가 없다' 는 의미를 포함하기에 이 글에선 구분해 쓴다.) 여기에 비 도덕을 의식하게 하는 대상으로 도덕이 아닌 무 도덕한 존재, '오릭스' 가 개입된다.
오릭스는 8세 가량의 나이부터 아동 포르노에 이용 되며 섹스 노리개로 전전해 왔지만 그것이 수치스럽다거나 잘못 되었다는 개념이 없다.
'비도덕' 했던 지미는 그런 그녀의 처지에 대신 분노하며 자신의 비도덕을 의식하거나 경계하고 그녀 안의 도덕을 일깨우려고 애쓴다. 역시 '비도덕' 한 크레이크는 지미와는 반대로 오릭스의 무도덕함을 찬양해 그녀를 이용하여 자신의 비도덕성의 당위를 찾으려 한다.
크레이크와 오릭스, 그리고 지미의 대치는 마치 아담과 이브, 뱀의 구도를 연상케 한다. 이브에게 모럴(선악과)을 알려주려고 했던 것은 신이 아닌 뱀이었다.
그렇다면 신은 어째서 인간에게 모럴을 부여하길 꺼려 했는가? 모럴의 연장선상에 과학이라는 이름의 신의 영역이 있었기 때문이었나?
절대 권능을 넘보지 않게 하기 위해 모럴을 깨우쳤을 때 파멸에 이르도록 미리 장치해둔 것인가? 신이 되려했던 아담, 크레이크가 만든 신인류가 뱀의 역할을 하는 지미를 통해 결국 같은 길을 갈 것이라는 암시를 남겨둔 결말은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체념과도 같다.
식용 가축들이 동족으로 만들어진 사료를 먹고 길러져 우리 식탁 위에 오른다. 인구 증가에 의한 식량 부족을 명목으로 유전자를 변형 시킨 GMO 식물들이 통조림으로 만들어져 시판된다. 이런 와중에 유기농을 먹자는 말은 사치로 치부된다. 먹어서 질병이 생겨도 운없는 이들의 '로또 당첨 뒤 번개 맞아 죽는' 일로 여겨진다. 인문학은 위기라는 말을 추레하게 달고 다녀야만 하고 교양 프로그램은 하나둘씩 사라지며 그 자리를 음란물과 폭력물이 차지한다. 좀더 자극적이지 않으면 그마저도 그 자리를 잃고 만다. 그래도 이렇게 되는 게 옳다 한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이것이라 한다. 맛있는 것을 싸게 다량으로 먹을 수 있고, 밑빠진 독 같은 욕구가 다 채워질 때까지 보여지는 것이 있어야 하며, 그것을 위해 지불하는 돈이 나라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고 사람을 살린다 한다. 그들은 갈 데까지 가보자 한다. 정녕 궁금하다.
그들은 그 길 끝에 대체 무엇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할까. 이미 울리고 있는 종말의 경종이 들리지 않는 것일까.
애트우드가 그려낸 세상이 그저 미래에 있을 법한 디스토피아가 아니라 현재의 모습에서 조금 더 나아간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끔찍하다. 이미 진행중인 세상을 의식해서일까, 그는 결말에 희망보단 경고 어린 낙심을 더 많이 남겨 놓았다. 인문학과 예술, 그리고 박애만이 겨우 파멸을 지연시키고 있을 뿐, 그것을 내던지거나 포기해 갈수록 종말은 더 이르게 다가온다는 작가의 외침은 전체 인류의 소수의 의지만으로 가냘프게 숨을 이어나가고 있는 현실이다. 그래서 멸망의 그 순간보다 갈수록 무감각 해지고 갈수록 비도덕해져 가는 당장이 더 무섭다.
살기 위해 투쟁하려는 사람이 불에 타 죽는 모습을 보고 아무 감흥을 못느낀다면, 유전자 변형된 식물과 병이 든 고기를 먹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다면, 도대체 지미와 크레이크가 살고 있는 세상과 다를 바가 뭐란 말인가. 우리는 이미 지옥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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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이책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맞습니다. 훌륭했어요. 여울. 마음에 열정이 느껴지는 글이었습니다. 대부분 문제의식이 중요하단 걸 다시 느낍니다.
여울 멋집니다! 다른이름으로 대상저장해서 그림첨부하면 돼요.
상반기 세여소 발표 중에 일등 먹은 자료입니다 ㅋ
작가사진을 올리려고 하는데 퍼오기가 안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