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실천 바톤터치] 미카의 고민
안녕하세요 미카 인사드려요^^
저는 작년 물길캠프(대학생 여성주의자들을 위한 캠프)에서 여성주의/민우회와 설레는 만남을 갖은 후, 그 매력에 너무 이끌린 나머지 회원으로 가입하게 된 미카라고 합니다.
작년, 멋진 여성주의자 친구들과 함께 페미니즘 액션도 진행해 보고, 여성주의 이론과 고민의 지점들을 나눌 수 있어서 저 스스로에게도 큰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러하듯, 여성주의는 제게 세상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안경’이 되었고 마치 공기와 물처럼 당연한, 제 삶의 일부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실 전 여성주의를 만나기전, ‘진보적 자유주의’-사민주의-생태주의-사회주의 등의 다양한 진보적 스펙트럼을 접하였고, 사회구조적 억압과 불평등에 부족하나마 싸워왔습니다. 사상이나 이론을 먼저 접한 것도 아니었고 오직 하나의 이념만을 토대로 학습하거나 운동한 것 또한 아니었습니다. ‘사회적 분노’나 ‘차별 감수성’으로 인해 가슴이 먼저 움직여 거리로 나선 후, 그 이후부터 여러 사상이나 조직들을 경험하였기에 다양한 이념과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여성주의와 민우회 또한 그렇게 인연이 닿은 것 같습니다. 여러 정치적 결들이 존재하는 운동진영에서 그리고 아예 차별감수성이나 사회구조적 시각조차 전무한 현실생활에서 ‘여성주의 감수성’은 제게 큰 힘이자 동시에 버거운 짐으로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바톤터치를 통하여 여성주의와 관련된 고민의 지점들, 삶에서 실천했던 작은 용기 그리고 현재, 다소 이런저런 일들로 주저하고 있는 제가 한걸음 더 내딛을 용기를 여러분께 얻고자 합니다. 아이고 부끄럽다..ㅋㅋ
<삶에서 여성주의 실천하기>
1. 삶에서 반여성주의, 성차별과 마주쳤을 때
저는 대학생이기 때문에 제가 부딪히는 삶의 공간은 대부분 학교입니다. 나름대로, 그나마 가장 진보적이고 열린 공간이 ‘대학’이겠지만, 모순적이게도 사회를 적나라하게 비추는 거울 또한 ‘대학’입니다. 권위주의적·위계적 권력관계와 이 권력관계를 등에 업은 성차별주의의 재생산은 강단 혹은 캠퍼스라 할지라도 예외이지 않습니다. 제가 교내에서 마주했던 성차별과 성희롱 그리고 대응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 수업시간에 발생하는 성차별, 성희롱적 발언입니다. 이번 학기에 듣는 타전공 수업의 교수는 상습적으로, 서슴없이 성차별적 언행을 일삼았습니다. 예를 들어, “너 왜이렇게 나를 빤히 쳐다보니? 선생님이 뽀뽀해줄까?.” 혹은 과거 정치인들의 말실수라 언급하며, “원래 여성의 삶의 질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여성들의 질(버자이너)을 확대해야한다.” 라고 실수했다며 박장대소 하거나 “대한민국을 관광대국으로 만들어야 한다가 아니라 ‘간강대국’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학생들의 웃음을 유발시키며 남성 중심적인, 교수와 학생 간의 ‘유대’를 맺으려 무던히도 노력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전 늘 경직됐고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무거운 침묵의 시위를 해야 했구요. 도대체 제 정신인지, 교수라는 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는지, 그리고 이 상황에서 웃는 저 학생들은 무엇인지. 수업을 들어가는 자체가 곤욕이었죠. 워낙 권위적인 교수라 수업 중의 토론조차 자신과의 생각이 다르면, 가차 없이 말을 잘라 버렸기에 합리적인 문제제기나 비판은 먹히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다른 대처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어차피 예의나 상식을 모르는 인간이기 때문에, 가장 직설적인 방법으로 대처하고자 했습니다. 성차별적 발언이 나오면 서슴없이 그 교수를 빤히 쳐다보며, 친구와 “저거 성차별 아니야? 진짜 왜 저러냐 아 후져.” 라며 그것도 ‘맨 앞자리’에서 그 교수의 수준에 맞게끔 이의제기를 했지요. (지금 생각하니 땀 삐질..ㅋㅋ) 특히 한숨은 효과가 가장 좋더군요.
또한, 성평등위원회에서 주최하는 각종 강연과 세미나에 대한 벽보를 얻어, 교수가 보는 앞에서 교실 벽에 붙이는 수고 또한 아끼지 않았습니다. 소심한 저항이 거듭되면 될수록, 교수는 아예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더군요. 성차별이 폭력임을 자각했다거나 성인지적 관점이 형성 됐기 보다는, 그저 귀찮은 학생의 입을 막기 위해 불편한 이야기를 아예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겠죠. 개인적이고 사소한 저항뿐만 아니라, 공적인 영역에서 학기말 평가나 성평등위원회를 통한 문제제기 또한 고려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대학 스스로가 지성을 가르친다고 자부한다면, 그 수업 안에서는 최소한 우리를 둘러싼 구조와 차별적 인식, 인습에 대해 한번쯤 의문을 던져봐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차별을 재생산 하고 있으니 비단 그 교수의 인격적 결함뿐만 아니라, 대학 내에 만연한 남성 중심적인 권력구조와 문화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하고 부딪혀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두 번째로는, 두려움과 분노의 경계선을 오고가게 만들었던 교내 성추행 사건입니다. 당시는 대학교 1학년 축제의 계절 5월, 모든 학과가 장터로 분주한 시기였고, 호객행위도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당시 강의실을 올라가고 있는 저에게 한 술 취한 남학생이 어깨를 두르고 신체 접촉을 하며 강제로 이끌고 가더군요. 다른 학생들이 제지하여 풀려났으나 강의실로 올라가는 내내 알 수 없는 수치감에 굉장히 당황스러웠습니다. 당시에도 워낙 ‘정의’에 민감하고 말과 몸이 먼저 나서는 타입어서 그 수치심과 당황스러움에 그저 가만히 분을 삭히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분노와 수치감이 정당하다는 확신이 들었고, 여기서 침묵한다면 성추행범이 반성은 고사하고 또 다시, 다른 여성에게 폭력성을 드러낼 것이라는 불안감과 불편함이 공기를 가득 메우더군요.
그리고 사실, 저를 움직이게 한 가장 큰 분노와 실망은 여성학을 함께 듣던 선배의 입을 통해서였습니다. 여성학 시간에 남학생 치고는 열심히 참여하던 선배였고, 저는 자연스레 그 선배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그의 이중적인 모습에 실망과 분노는 더해질 뿐 이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공부했던 여성학, 여성주의는 학점용 강의일 뿐이었고 그의 인식은 여전히 제자리인 것을 발견한 것이죠. “남자는 술 마시면 그럴 수 있다.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지 말아라.” 우습게도 얼마나 배신감이 느껴지던지. 학점을 위해 여성주의를 말했던 그 선배의 이중성에 할 말을 잃었고 누군가에게 기대는 것이 아닌 나 스스로 이번 일을 해결해야겠다고 번뜩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성학 시간에 그토록 논쟁하고 외치던 수많은 언어들, 그래 그거 한번 해보자.
우선 학과 조교에게 달려가 장터를 열었던 과 조교에게 연락을 취했고 해당과의 학생회장과 가해자 남학생을 소환했습니다. 조교가 해당과의 학생회장에게 연락을 취했을 때 이미 학생회장을 가해자 남학생이 누군지 눈치 채고 있었다니, 가해자 남학생이 저 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여학생을 희롱하고 추행했을지 불 보듯 뻔 한 상황이었습니다. 성추행범 남학생과 대면하는 자리에서 분노를 최대한 자제하며 조목조목 그의 잘못과 행동을 질책했고 그에 응당한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사법적 절차까지 고려한다고 말하니, 불과 몇 시간 전까지 기세등등하게 제 어깨를 만지고 강제로 끌고 가던 마초는 온데 간데 사라져 온순한 양만이 남아 있는데, 그 이중성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더군요. 가해자 학생과의 대면에서 가장 황당했고 질책했던 부분은, 강제적인 신체접촉이나 언어가 ‘성희롱’이라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은 단순히 친근함의 표현이었다, 술이 취해서 자신의 행동을 제어할 수 없었다 등등.. 전형적이고 무책임한 대답들만 반복이 됐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 ‘친근함’의 표현이, 제어할 수 없는 행동이 유독 여학생들을 표적으로 표출된 것인지, 그것 자체가 남성 중심적인 행동이며 성희롱인 것임을 모르는건지,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것인지에 대해 격양되게 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학내 징계위원회에 소환하려 했으나 가해자 남학생의 호소와 학생회장의 간곡한 부탁으로 결국 훈방조치로 이 사건은 종결 되었습니다만 그 사건을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 아쉬움이랄까, 고민의 지점들이 많이 남았습니다. 당시 성평등위원회가 있었더라면,(2012년에 건설됨) 적어도 학생들이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당했을 때, 방법을 몰라 혼자서 침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분노에 귀 기울여 문을 두드릴 수 있을만한 기구가 있었더라면, 나 혼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구설수나 눈초리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교내에서 일어나는 성차별과 폭력문제를 이슈화 시키고 공감대를 함께 만들어갈 지지기반이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나 자신에게도 많은 학우들에게도 좀 더 큰 변화가 있지 않았을까..라는 기대감과 거기에까지 미치지 못한 제 능력에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또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 그때 침묵했더라면, 조금 더 용기를 내지 않았더라면, 나의 감정에 귀 기울이지 않았더라면 어떠했을까. 물론, 이 일로 교내에 미치는 파급력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성희롱이 근절될 리 만무하겠죠. 하지만 저 자신과 제 주위에 엄청난 작용을 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 당시 듣던 여성학 시간에는 이 사건을 계기로 성차별과 성희롱에 대해 꾸준히 문제제기를 했었고, 제 경험과 행동은 많은 학생들에게 문제의식으로 다가갔습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이런저런 일을 도와주던 친구들과는 자연스레 ‘성’에 관한 문제의 지점들을 나누게 됐고 자연스레 여성주의감수성과 차별에 대한 인식들을 공유하게 된 것 같습니다. 혼자서는 미력하지만, 이렇게 확신을 갖고 행동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점점 모여 하나의 뚜렷한 세력으로 나타난다면, 그리고 그 세력이 여성들의 지지기반이자 버팀목으로써 존재한다면,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개개인의 왜곡된 인식이 한 순간에 바뀌진 않을지라도 여성들의 주체적/정치적 역량이 점진적으로 고양될 것입니다. 주체적 역량을 지닌 운동진영이 중심을 잡고 정치적 의제화와 대중투쟁에서 보다 많은 대중을 견인해 내고 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다면 성평등한 세상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겠죠? 따라서 민우회와 멋진 회원들이 손읍 잡고 더욱 더 퐈이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저도 후원금 및 행동을 더욱 퐈이아!ㅋㅋ
2. 다른 운동진영 속에서
요즘 살짝(?) 고민되는 문제가 바로 이 지점입니다. (많은 분들이 고민하듯이ㅠㅠ) 여성주의와 정치적 결이 다른 운동진영 속에서 활동할 경우, 성인지적 관점이 결여된 상황이 발생하거나 상대방간의 이론적, 사상적, 조직에 관한 오해가 쌓이고 쌓인 상태에서 소통부족으로 갈등이 야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 또한, 몇몇 고압적이고 위계적인 자칭 THE Left들과의 대화를 통해 소통의 단절이나 극도의 오만함에 몸서리가 쳐지곤 했습니다. 정치적 목적이나 주체가 다른 다양한 운동들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서로의 운동과 지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각기 진영이 서로를 타자화 시키는 경향도 적지 않기 때문에 사회운동이라는 큰 틀 안에서 연대의 지점이 줄어드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충분한 토론, 생산적 논쟁을 통해 사회, 노동, 빈민, 통일, 시민, 생태운동과의 연대의 지점을 모색하고 여성주의감수성과 성인지적 관점을 각기 다른 운동진영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상대적으로 세력이 작은(?) 여성운동진영만 이렇게 외치면 무엇하나.. 누구하나 들어주기나 할까? 라는 회의감도 동시에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운동진영 안에 존재하는 위계적 구조는 원활한 소통과 연대의 가능성을 앗아가는 고질적 병폐이지만, 끊임없이 재생산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적인 조짐들도 보입니다. 작년, 학생인권조례 투쟁의 기간 동안 성소수자와 학생인권을 지지하는 재능지부 특수고용노동자들의 연대방문과 퀴어퍼레이드때 쌍용차 해고노동자를 지지하는 서명이나, 메이데이와 각종 투쟁의 현장(희망버스때 퀴어버스, FTA 반대집회)에서 보이는 무지개 깃발은 많은 노동자들과 활동가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연대를 통한 소통창구의 기회를 열어주었습니다.
토론과 논쟁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운동과 투쟁의 현장에서 여성주의자들의 존재와 여성주의 문제의식을 알리는 것은 다른 운동진영과 대중에게 현장의 경험이자 소통의 교육으로써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오랜 시간 여성운동에 헌신하는 활동가들이 보는 글인데, 매우 부끄럽습니다만 저 나름의 소박한(?) 운동경험을 통한 고민과 소통의 지점들을 모색해 보았습니다. 앞으로 더욱 고민하고 부딪혀야하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3. 빗물전략- 주위 사람들과 여성주의 나누기
저 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그러하겠지만 가장 가깝고 친한 관계에서 오히려 소통의 부재나 불편함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긴 시간 함께할 장기관의 관계이기 때문에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꾸준히 ‘빗물전략’-가랑비에 옷 젖는다-으로서 성평등 인식과 여성주의 감수성을 관계에서 뿌리 내려가야 합니다. 제가 주로 많이 활용하는 방법은, 꾸준히 신경 거슬리지 않게 여성이슈나 교내에서 부딪히는 차별들 조잘조잘 말하기, 민우회에서 받아온 팜플렛이나 자료 설명해주고 뿌리기, 문화제(촉발 문화제 헤헷)나 연극(버자이너 모놀로그)을 통해 직접 경험하게끔 유도하기 등 끈질긴 실천운동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단기간 내 효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2년 반에 걸친 끈질긴 노력으로 과 동기 친구들은 인식이 크게 변화했습니다. 아르바이트계의 대모라 불리는 한 친구는,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에서 여성이 받는 성차별에 대해서 자각하게 되었고 한 친구는, 견고한 순결 이데올로기와 성별 이분법적 사고에서 저와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함께 보며 자신의 몸과 경험을 긍정하게 되었습니다. 또 한 친구는, 제도적 성평등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친구사이 연인관계에서도 성평등한 관계가 바탕이 돼야 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자신을 사랑하고 긍정해야 하는 것임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크고 작은 변화들이, 친구 가족들을 통해 조금씩 발견될 때마다, 희망과 운동의 필요성을 다시금 느낍니다. 무엇보다, 저 자신이 여성주의를 확신하고 긍정함을 통해 이들과 소통하고 성장한다는 것이 큰 힘이자 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4. 여성주의를 가슴 깊이 뿌리 내리기
민우회에 가입한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회원이, 활동가들과 장기회원들 모두 볼 수 있는 글에서 너무너무 부끄럽지만ㅠㅠ..ㅋㅋ 고민의 지점과 다짐을 함께 나누기 위해 용기 내어 봅니다. 제게 여성주의는 보다 미묘하고 다양한 차별과 폭력에 귀 기울이게 하고 행동하게 했으며, 저에게 있어 단점이나 한계라 느꼈던 많은 점들을 변화시켰습니다. 여성주의는 지지기반인 동시에 삶에서 업고 다녀야할 등짐이기도 합니다. 거친 삶의 물살에서, 반드시 놓쳐서는 안 될 등짐이고 반드시 세계로 가져가야 할 하나의 미션이며 동시에 위로와 엄청난 동력을 주는 신비의 등짐(?)입니다.
이 신비의 등짐과 함께 사회적 차별과 불의를 외면하지 않고 여성주의 내공으로 당당히 마주하고 싶습니다. 미력하나마 여성운동진영의 주체적 역량을 키우는 작업에 힘을 보태서 보다 평등하고 무지개 다양성이 빛날 수 있는 세상, 차이가 지배의 동력으로써 작용하지 않는 세상, 우리가 함께 웃을 수 있는 세상! 꼭 만들고 싶습니다. 앞으로 민우회와 이 길 함께 걸어가고 싶네요.
여러분 우리 힘내요
파이팅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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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너무 멋지세요! :) 저도 더 많이 공부하고, 나누고, 연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어요 :)